나만의 책을 고르자........펌
기본 주제방 2003/12/18 11:26   http://blog.azoomma.com/badasalang/109775
] 나만의 책을 고를 권리

방송이 추천하면 너도나도 … 서로 다른 생각 발견하자


▲ 정이현/소설가

지방에 내려가는 길이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평범한 중년여성이 기차가 움직이자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이 달의 선정도서’로 소개된 책이었다.

‘감동적’이며 ‘좋은’ 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괜히 반가워졌다. 그러나 화장실에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곧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좌석 뒤에 앉은 초등학생 소년의 무릎 위에도 아까 그 책이 얌전히 놓여 있었던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마중 나온 후배에게 이 일화를 얘기하니,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 책, 요즘 나도 읽고 있는데….” 동시에 한 가지 책을 읽는 어린이와 대학생과 주부. 그 일사불란한 질서를 창조한 공중파 방송의 위력 앞에 새삼 압도된 순간이었다.

방송 선정도서를 ‘출판가의 로또 복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유가 되었다. 대형서점의 서가 한구석에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채 꽂혀 있던 몇 해 전의 책들이, 방송에서 ‘간택’을 당한 그 다음 날 곧장 베스트셀러 순위에 진입하는 광경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국민들, 특히 어린이들에게 독서를 즐거운 일로 각인시켰다는 점이 도서권장 방송 캠페인의 큰 공로다. 또한 전국 각지에 어린이 도서관을 짓는 등의 공익사업도 방송의 힘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꿈이었을 게다. 방송에서, 우리 모두 단합하여 책 따위 읽지 말자고 선동하는 것보다 이런저런 책이 좋으니 함께 읽자고 권하는 편이 훨씬 바람직한 태도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빛이 밝다고 해서 그림자를 간과할 수는 없다. 방송 선정도서들이 무척 잘 팔렸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건만 그에 비례하여 출판계의 전체매출이 늘어났다는 당연한 얘기는 왜 들려오지 않는 것인가. 오히려 수많은 군소 출판사들은 IMF 시절보다 더욱 절박해진 사정을 호소한다. 출판계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나날이 심화하고 있다. 어려운 시절을 따뜻하게 회고하는 전 국민용 ‘착한’ 책들 외에 새롭거나 실험적인 세계관이 내재된 작품은 시장에서 외면당한다.

물론 독자들의 입장이 이해되기도 한다. 너나없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에 평범한 가정에서 도서구입의 몫으로 책정한 예산을 올리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책 살 돈, 1만원’이 똑같이 주어진 상황에서 텔레비전에서 양서(良書)로 공인한, 더구나 ‘남들 다 읽는 책’을 선택하는 것이 실용적인 구매 행위임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테니 말이다.

온 국민의 독서계획을 대신 세워주던 대표적인 방송 프로그램이 곧 폐지된다고 한다. 그 프로그램의 공을 인정하는 만큼 안도감도 든다. 책은 한 사회 구성원이 모두 다 똑같은 생각을 하게 하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와 다른 타인의 생각을 발견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반성적 성찰의 매체가 바로 책인 것이다. 그 성찰은, 서점에 산처럼 쌓인 수십만 가지의 책들 중에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한 권이 무엇인지 섬세하게 고민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니 2004년,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모두가 각자의 독서취향을 마음껏 계발하고 ‘나만의 책’을 고르는 그 당연한 권리를 즐겁게 만끽했으면 참 좋겠다.

(정이현·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