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은 모든 것이 진해진다.
소리도 진해지고 향기도 진해지고 추억도 진해진다.
가뜩이나 향이 강한 자스민은 비오는 날이면 더욱 진한 향기로 내 가슴의 문을 두드린다.
자스민의 향기는 가슴 속에 묻혀있던 추억을 불러오고, 잊었던 얼굴들을 떠올리게 한다. 자스민의 향기는 내가 여자임을 알게하고, 나로하여금 다시 꿈꾸게 한다.
베란다 한 쪽 끝에 심은 자스민은 내가 키우는 두 번째 자스민이다.
두번 째 자스민이 보라빛과 하얀 빛의 꽃을 달고 비오는 창을 바라보고 있다.
비오는 창에 잊고있었던 첫 번째 자스민의 추억이 그려진다.

혼자 지내던 시절이었다.
조그만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베란다에 놓을 화초를 사러 구파발로 나갔다.
농원의 꽃들을 구경하고 있는데...어디선가 향그런 냄새가 났다.
냄새를 쫓으니...보라색과 하얀꽃이 서로 다투어 피어있는 화분앞에 서게 되었다.
한 참을 향기에 취해 화분앞에 앉아 이리저리 꽃과 잎을 보고있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한 말씀 건네신다. "향기가 좋죠? 자스민이에요. 그거 하나 들여다 놓으면 온 집안의 향이 가득한 게 왠만한 향수 뿌리는 것보다 낫죠" 하신다.
꽤 비싼 돈을 주고 그 화분을 차에 싣고오는 동안에도 자스민의 향기는 차안에 가득했고,
난 담배냄새로 찌든 집안의 향기가 바뀔것이라는 즐거운 기대감으로 부풀어있었다.
그렇게 자스민 화분을 베란다에 들여놓고는 거실창을 늘 여어두었었다. 매일 물을 주고...시든 꽃을 따주면서 자스민 향 속에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담배냄새가 자스민의 향 속에 묻히길 바라며....
그렇게 한 달을 즐겁게 보내고 자스민의 꽃이 다 지고 잎이 무성해지기 시작하자 나의 자스민 사랑도 시들해졌다. 향이 없는 자스민은 그저 이름 없는 여느 화초와 다르지 않았다.
다시 집안에는 담배냄새가 매퀘하게 베어갔고, 이것 저것 행수를 뿌리는 것으로 저녁 일과를 시작하곤 했다. 자스민에 대한 사랑이 식어가면서 난 베란다에 나가는 일이 뜸해졌고, 거실 창문을 열어놓는 일도 냄새를 빼기 위한 공간 정도뿐이었다. 바같의 소음이 귀에 거슬리고 공기청정기를 들이면서 거실창을 열고 베란다로 나가는 일은 더욱 적어질 수 밖에 없었다. 내 사랑을 잃은 자스민은 내게서 물을 얻어먹는 일도 적어적고...뜨거운 여름의 태양을 홀로 버티다가 혼자 가을을 달려 겨울나무가 되어버렸다. 누렇게 마른 잎들이 화분 주변 가득히 쌓이고, 나무는 바짝 타올라 속이 비어버리고 말았다.
긴 출장을 다녀와서 집안의 공기를 바꾸기 위해 거실 창을 열고 베란다 창을 열다가
난 내가 죽인 그 자스민 화분을 발견했다.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떨어진 잎들조차 바싹 말라버린 자스민은 그렇게 내게서 버림받고 혼자 죽어있었다.
'세상에..... '
내 손으로 사들인 생명을 죽게 버려두었던 난 향기만 탐했던 스스로가 너무도 부끄러웠다. 향기가 시들었다고 해서, 꽃이 졌다고 그 생명을 버려두어 죽게 할 수 있는지.... 내가 그런 사람이었구나.....내가 그렇게 이기적이고 순간적이고 마음이 메마른 사람이었구나..... 그런 내가 누굴 탓하고 누굴 원망하고 있는가....나는 허망하고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으로 자스민의 마른 잎을 바라보며 한 참을 울었다. 조용히 울었다.
내 마음을 모른 척한다며 얼마나 악다구니를 해대고 얼마나 그를 원망하고 얼마나 울었었던가....그런 내가 그와 뭐가 다른가....나도 그처럼 내 손으로 고르고 내손으로 사온 자스민을 저리 죽도록 내버려두었는데....어떻게 내가 그를 원망하고 그를 밀어낼 수가 있었는지....
내 첫 번째 자스민은 그렇게 스스로를 희생하여 내게 너무도 소중한 사랑의 마음을 깨우쳐주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