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에 관한 추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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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데모가 무지 심했다. 학생들이 연신 분신자살을 하고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사회의식이라고는 쥐뿔도 없었던 나는 남의 일로만 생각하고 데모를 하는 학교앞에 최루탄이 뿌옇게 쏘아지기전에 휴강한 학교를 빠져나와 영화나 보러가는 그런 애였다. 그날도 서울시내 학생들이 모두 서울역 광장에 모이는 집회가 있다고 아침부터 학교는 뒤숭숭했다. 친구들은 일찍 휴강한 학교를 빠져나갔는데 왠일인지 난 학교에 남아있었다. 수녀원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이 집회를 한다는 서울역 명동 종로통이라서 어찌 돌아갈 것인가를 잠시 고민하면서 동아리방을 빠져 나오다가 그를 만났다. 그때 과대표를 맡고 있었고 잠시 학생회일도 하고 있었던 그애는 막 집회에 참석차 동아리방을 나서는 중이었다. 3층 복도에서 마주친 그애가 뜬금없이 ' 같이 갈래?' 했는데 무슨 맘이었는지 '그래.'하고 따라 나섰다. 데모라고는 새학기에 등록금 인상 반대집회에 참석한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그애는 선봉대였다. 선봉대가 뭐냐면 집회행렬 맨앞에서 돌도 던지고 구호도 선창하고 이러는..... 교문에서 전경들과 딱 마주서서 구호를 선창하고 노래도 부르고 어깨동무도 하고.. 그날은 위에서 지시가 있었는지 집회 한시간쯤 지나자 전경들이 길을 터 주었다. 행진을 하며 한강대교를 건너고 용산을 지나 서울역으로. 서울시내 대학생들의 반쯤은 다 모인듯했다. 거기까지 난 마냥 신기하고 재미있고 뭐라도 된듯 흥분해있었고 그애는 집회운영하랴 나 챙기랴 왔다갔다 분주했다. 잠시후 남대문을 지나면서 집회는 거세졌다. 그때까지 멀찌감치서서 구경만 하던 전경들이 가까이 다가서기 시작했고 최루탄이 날라와 눈물 콧물이 막 쏟아졌다. 잠시 집회행렬은 흩어졌고 난 골목구석에 몸을 숙이고 켁켁 거리면서 울었다. 정신 없는 사이에 그애와 헤어졌다. 최루탄이나 전경보다도 그애가 곁에 없다는게 너무 겁이 났다.
잠시 후 집회행렬이 다시 모이기 시작할 무렵 어디선가 그가 달려왔다. " 이제부터 내 손 놓지마." 진짜 그때부터 집회끝날때까지 손을 꼭 잡아주었다. 코풀때빼고.. 덕분에 집회선봉에서 구호도 외쳤고 너무 앞에 섰기에 기자들에게 사진찍히면 어쩌나 걱정도 쪼금했다. 최루탄피해서 달아나는 법도 배우고 실제로 집회가 끝나갈 무렵에 발밑으로 날라온 최루탄을 피구하듯이 제자리에서 피하기까지 했다. 그애가 손을 잡아주어 두려운게 없었다. 그리고 따뜻했다. 집회가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오면서 서로 빨개진 눈과 코를 보면서 웃어댔고 함께 마시던 소주는 그날따라 달았다.
기숙사로 돌아왔더니 오빠(지금의 남편)에게서 열통도 넘는 전화가 왔던 메모가 문앞에 꽂혀있었고 다음날 무진장 혼났다. 물론 그애얘기는 쏙 빼고 말안했지만 범생이었던 오빠는 내가 무슨 불순사상과 접해서 애가 좀 이상해진게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숨기지 않았다. 그애와 다음에도 학교에서 자주 마주쳤지만 이미 내가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걸 알고 있던 까닭에 서로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지냈다.
그해 여름 군대가기 전에 여행을 한다며 시골로 찾아왔었다. 못나갔다. 아니 안나갔다. 사실 그애는 정말 친구로 생각했는데 괜히 내가 오버를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나가서 그앨 만나면 무슨일이 생길것처럼 내맘이 흔들렸다는것만이 진실이다. 군대가기 며칠전에 술먹고 한번 찾아왔었다. 뜬금없이 " 편지 같은건 쓰지 마라." 하고는 가버렸다. 편지 꼭 써달라는 말보다 더 마음이 짠 했지만 진짜 한통의 편지도 쓰지 않았다. 내 인생이 사랑때문에 엉키게 될까봐 두려웠다.
이런 사소한 기억들 그애는 기억이나 할까? 오늘 10년만에 대학교 동기들 모임이 있다. 이런저런 지난 기억들을 되새겨보니 추억의 갈피 한 구석에 그애가 있다. 호탕했던 웃음소리과 유난히 따뜻했던 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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