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풀향기 ***
37red ━┓ 내츄럴 2004/08/11 12:49   http://blog.azoomma.com/37red/150097


    *** ↑ 냉초 ***



    평창까진 아직 멀었다.

    근데 이 길은 왜 그리 먼 거야.

    내 머리는 온통 '산허리에 피어난 메밀꽃이 달밤에 소금을 뿌린 듯

    흐뭇이 다가와 숨이 막힐 지경'인데... .


    가는 곳이 거기만 아니었어도 따라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의무감이랄지,

    밀린 숙제라 해야 할지,

    아무튼 읽고 쓰는 쪽에 뜻을 둔 사람들을 흠모하며 기웃대다보니

    메밀꽃과 봉평장은 꼭 봐야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시월의 볕을 쫓아 기대와 설렘을 안고 목적지에 다달았을 때는

    설핏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산간지방엔 벌써 첫서리가 내린 뒤라서 바라던 메밀밭의 눈부신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아쉽게도 '허생원과 동이'가 이미 그 흰 소금을 모두 소달구지에 싣고

    갔던 탓이다.

    마을 사람들 말로는 한 주일만 일찍 왔어도 볼 수 있었을 거라 했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떤가.

    언덕 저편 무리 지어 수런거리고 있는 꽃대궁만 보아도 기억의 사다리는 어느새

    내 어릴 적 풀숲에 닿아 있는 것을.

    아스라이 눈에 밟히는 반딧불 같은 풍경들.

    그 따스함이 있기에 내 삶은 그런대로 견딜만하다.

     

     

    *** ↑ 타래난초 ***


    오래 전 산 마을 학교에선 '잘살아보자'는 구호아래 풀씨를 모아 오라는 과제 아닌

    과제가 있었다.

    오리 정도는 가깝다고 여기며 다니던 길,

    동무들과 가위 바위 보를 하며 아카시아 잎을 하나씩 떼어내는 놀이를 하며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책 보따릴 토방에 던져놓고 곧장 산으로 들로 내달리던 날들이다.

    풀씨를 훑어 주머니에 넣고 풀물 든 손을 휘휘 저으며 언덕을 내려올 때면 어김없이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앞 산마루 위에 걸터앉은 노을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풀을 베어 말려 땔감으로 쓰던 시절이니 참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억새며 산 쑥,

    칡넝쿨이 그득히 담긴 머슴 아저씨의 나뭇짐 속엔 때때로 산딸기 가지나 머루송이,

    개암 열매 같은 천연 간식이 자주 들어있었다.

    풀향기 그윽한 지게 더미에서 그것을 받아들고 좋아라 나풀대던 열 살 어린 계집애가

    중년이 되어 예까지 돌아온 것이다.

     

     

    *** ↑ 이질풀 ***


    머슴이었던 이서방의 지게에 실려온 작은 들꽃 더미들은 마당에

    널렸다가 마른 풀냄새를 일으키며 아궁이에서 불꽃으로 타들어 갔다. 더러는 젖은 채

    마당에 펼친 멍석 끝에서 저녁 모깃불로 쓰이기도 하고.

    그 풋풋한 냄새와 매운 연기로 모기를 몰아내며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금세 별이

    좌르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 아름다웠던 시간을 혹시 이곳에서 찾을 수 있을까.

    모처럼 벗어난 일상, 달콤한 기억 속을 더듬다보니 숙소로 정한 산아래 오두막에

    이르렀다.

    그 뜨락에 서면 흘러간 시간의 강물을 움켜쥘 것만 같았다.

    그러나 우린 왜 생활의 신선한 기쁨이나 즐거움을 흘러간 노래 가락에나 묻으며

    지내야 하는 건지... .


    이슬로 세수한 들꽃을 꺾어 식탁에 얹고 모두 둘러앉아 아침을 먹었다.

    밥맛이 그만이다.

    그야말로 '황후의 밥, 걸인의 찬'이라고 해야 할까.


    가랑비를 타고 와 코끝을 간지럽히는 감국,구절초,

    쑥부쟁이 냄새에 언저리 다래나무에게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간밤 까만 비로드 천에 덮혔던 하늘이며 잠자던 새,

    그리고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던 순수의 무리를 욕되게 한 것은 아닌가 해서.

    하지만 내가 흠뻑 웃을 수 있었던 것은 뒤꼍 가마솥에 한 소쿠리 담겨

    있던 찐 감자의 파실파실한 분만큼이나 뽀얀 의식이 가슴자락을 메우고 있었던

    까닭이다.

     

     

    *** ↑ 뻐국채 ***


    나는 들꽃처럼 평범하면서 정서가 섬세한 사람을 좋아한다.

    어려움 속에서도 삶을 아름답게 볼 줄 아는 마음과 작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이를 보면 주저없이 달려가 덥석 손을 잡고 싶어진다.

    들꽃엔 그런 시선이 들어 있다.

    보는 이에게 아무런 짐 지우지 않고 소슬한 침묵으로 가난한 이들을 달래주고

    어루만지는 기운.


    그래서인가,

    나는 그 작은 생명이 눈물이 날 만큼 사랑스럽다.

    산길이나 들길을 걷다보면 이따금 여린 꽃잎들이 내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여치 소리 같기도 하고 풀피리 소리 같기도 한 그 내밀한 속삭임을... .


    우연한 자리에서 만난 어떤 분이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저어..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언제 식사를 한 번 대접하고 싶습니다.

    '풀향기'란 음식점이 있는데 선생의 이미지가 그곳의 분위기와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 ↑ 흰각시취 ***


    풀향기!

    이제껏 들어본 인상 평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말이지만,

    또 고맙기 그지없지만 낯가림을 잘하는 나는 눙치는 말로 대답을

    회피하고 말았다.
    어조는 부드럽지만 뜻은 분명한 사람을 보면 들꽃을 떠올린다.

    들꽃은 나는 이런데 너는 왜 그러냐고 따지질 않는다.

    그래서 편안하다.

    뿐만 아니라,

    온 힘을 다하여 피운 꽃이 속절없이 진다고 하여 나처럼 안달하거나 속상해 하지도

    않는다.


    산과 들 어느 곳에서나 피어나 말없이 제 길을 가는 풀꽃이고 싶다.

    그처럼 순수하고 맑은 생각으로 내 안의 꽃을 피워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참아내기 힘든 삶의 아픔들을 들길을 거닐듯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담담히

    남아있는 길을 걷는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랴.

     

    +++ 글/전성순(수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