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주 가끔은
사과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들이
두 팔 벌리고 서 있는
사과나무밭
태양이 눈부신 날이어도 좋고
눈 내리는 그 저녁이어도 좋으리
아주 가끔은 그렇게
사과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
내가 아직 어린 소년이어도 좋고
사과나무처럼 늙은 뒤라도 좋으리
가끔은 그렇게
사과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
사과나무....류시화

겨울 숲에서 노려보는 여우의 눈처럼
잎 뒤에 숨은 붉은 열매처럼
여기
나를 응시하는 것이 있다
내 삶을 지켜보는 것이 있다
서서히 얼어붙는 수면에 시선을 박은 채
돌 틈에 숨어 내다보는 물고기의 눈처럼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건방진 새처럼
무엇인가 있다
눈을 깜박이지도 않는 그것
눈밖에 없는 그것이
밤에 별들 사이에서, 내가 좋아하는
큰곰별자리 두 눈에 박혀
나를 내려다본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때로 그것은 내 안에 들어와서
내 눈으로 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내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것은 무엇일까
내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고 있을까
여기 겨울숲에서 노려보는 여우의 눈처럼
잎 지고 난 붉은 열매처럼
차가운 공기를 떨게 하면서
나를 응시하는 것이 있다
내 삶을 떨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류시화

슬픔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이 환하다
누가 등불 한 점을 켜놓은 듯
노오란 민들레 몇 점 피어 있는 듯
슬픔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민들레밭에
내가 두 팔 벌리고
누워 있다
눈썹 끝에
민들레 풀씨 같은
눈물을 매달고서
눈을 깜박이면 그냥
날아갈 것만 같은
눈물....류시화

날개
물 위에 뜬 빛
어린시절의 기억
외로운 영혼
죽음 뒤에 나타나는 빛의 터널
자작나무의 흰 껍질
강의 마른 입술
오래된 상처
사막은 무슨 생각을 하며
하얗고 긴 생을 견디는 걸까
여기 하얀 것들이
내 곁에 있다
오래된 상처
강의 마른 입술
자작나무의 흰 껍질
죽음 뒤에 나타나는 빛의 터널
외로운 영혼
어린시절의 기억
물 위에 뜬 빛
날개
하얀 것들....류시화

어떤 러시아 시인은 말했다
피로 써라
시를
시 같은 유서를
다만 피로 써라
나는 피로써 시를 쓰지 않는다
시가 거의 유행가처럼 되어 버린 곳에서
때로는 언어 이외의 것으로 울고 싶어지는
아, 이 무슨 삶이란 말인가
피로 써라....류시화

시월의 빛 위로
곤충들이 만들어 놓은
투명한 탑 위로
이슬 얹힌 거미줄 위로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가을 나비들의 날개짓
첫눈 속에 파묻힌
생각들
지켜지지 못한
그 많은 약속들 위로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한때는 모든 것이
여기에 있었다, 그렇다, 나는
삶을 불태우고 싶었다
다른 모든 것이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릴 때까지
다만 그것들은 얼마나 빨리
내게서 멀어졌는가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여기, 거기, 그리고 모든 곳에
멀리, 언제나 더 멀리에
말해 봐
이 모든 것을 위로
넌 아직도 내 생각을 하고 있는가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류시화

소금별에 사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릴 수 없네
눈물을 흘리면
소금별이 녹아 버리기 때문
소금별 사람들은
눈물을 감추려고 자꾸만
눈을 깜박이네
소금별이 더 많이 반짝이는 건
그 때문이지
소금별....류시화

별은 어디서 반짝임을 얻는 걸까
별은 어떻게 진흙을 목숨으로 바꾸는 걸까
별은 왜 존재하는 걸까
과학자가 말했다, 그것은 원자들의 핵융합 때문이라고
목사가 말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증거라고
점성학자가 말했다, 그것은 수레바퀴 같은 내 운명의 계시라고
시인은 말했다, 별은 내 눈물이라고
마지막으로 나는 신비주의자에게 가서 물었다
신비주의자는 별 따위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뭉툭한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 차라리
네 안에 있는 별에나 관심을 가지라고
그 설명을 듣는 동안에
어느새 나는 나이를 먹었다
나는 더욱 알 수 없는 눈으로
별들을 바라본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인도의 어떤 노인처럼
명상할 때의 고요함과 빵 한 조각만으로
만족하는 것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그 노인처럼
밤에 먼 하늘을 향해 앉아서
별들을 바라보는 것을 방해받는 일
별....류시화

입을 벌리고 잠을 자는 것은
인간뿐
삶이 그만큼 피곤하기 때문이다
굴뚝 속에는 더 이상
굴뚝새가 살지 않는다
보라, 삶을
굴뚝새가 사라진 삶을
모든 것이 사라진 다음에
오직 인간만이 남으리라
대지 위에
입을 벌리고 잠든 인간만이
굴뚝 속에는 더 이상 굴뚝새가 살지 않는다....류시화

거리에서
한 남자가 울고 있다
사람들이 오가는 도시 한복판에서
모두가 타인인 곳에서
지하도 난간 옆에 새처럼 쭈그리고 앉아
한 남자가 울고 있다
아무도 그 남자가 우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아무도 그 눈물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거리에서 한 남자가 울고 있다
한 세기가 저물고
한 세기가 시작되는 곳에서
모두가 타인일 수밖에 없는 곳에서
한 남자가 울고 있다
신이 눈을 만들고 인간이 눈물을 만들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가 우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나는 다만 그에게
무언의 말을 전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눈물이라고
눈물....류시화

벌레처럼
낮게 엎드려 살아야지
풀잎만큼의 높이라도 서둘러 내려와야지
벌레처럼 어디서든 한 철만 살다 가야지
남을 아파하더라도
나를 아파하진 말아야지
다만 무심해야지
올 일이 있어도 벌레의 울음만큼만 울고
허무해도
벌레만큼만 허무해야지
죽어서는 또
벌레의 껍질처럼 그냥 버려져야지
짧은 노래....류시화

세상의 정원으로 나는 걸어들어갔다
정원 한가운데 둥근
화원이 있고 그 중심에는
꽃 하나가 피어 있었다
그 꽃은 마치 빛과 같아서
한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셨다
나는 둘레에 핀 꽃들을 지나
중심에 있는
그 꽃을 향해 나아갔다
한낮이었다, 그 길이 무척 멀게 느껴졌다
나는 서둘러야만 했다
누구의 화원인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 그것은
나를 향해 저의 세계를
열어 보이는 듯했다
밝음의 한가운데로 나는 걸어갔다
그리고 빛에 눈부셔 하며
신비의 꽃을 꺾었다
그 순간 나는 보았다 갑자기
화원 전체가 빛을 잃고
페허로 변하는 것을
둘레의 꽃들은 생기를 잃은 채 쓰러지고
내 손에 들려진 신비의 꽃은
아주 평범한
시든 꽃에 지나지 않았다
신비의 꽃을 나는 꺾었다....류시화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네
소금 인형....류시화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류시화

고요한 숲
나뭇가지 위에 둥지가 하나 있다
어느 여름날 나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발소리를 죽이고
가시나무에 찔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한낮에 잎사귀가 넓은 식물들 곁을 지나
아무도 몰래 나무 밑으로 접근했다
새는 그때가지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언젠가 입은 상처로
나무둥치에 생긴 흉터자국에 한쪽 발을 걸치고
나는 나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숨을 죽인 채
한낮의 고요 속에
마치 금지된 열매를 따려는 사람처럼
손을 뻗어 둥지 밑 나뭇가지를 붙잡았다
한쪽 발로는
몸의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나는 나뭇가지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어
둥지가 있는 곳까지 몸을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고개를 빼고 재빨리
둥지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빈 둥지였다
빈둥지....류시화

비 그치고
나는 당신 앞에 선 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
내 전생애를 푸르게, 푸르게
흔들고 싶다
푸르름이 아주 깊어졌을 때쯤이면
이 세상 모든 새들을 불러 함께
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비 그치고....류시화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올리고
별들이 가득 내린 강을 건너다가
그만 별에 발을 찔렸습니다
지금은 집에 돌아와
그 옛날 내가 떠나온 별에게
긴 편지를 씁니다 어떤 영혼은
별에서 왔다는
별에서 와서 고독하다는
그 말을 내 집 지붕에 얹어둡니다
이 짧은 지상의 삶과는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나는 잊지 않았습니다
내가 띄운 편지가 그 별에 가 닿았는지
내 집 지붕 위에서 별 하나가 흔들립니다
지상에서 잠시 류시화라고 불리웠던....류시화

차가운 별
차갑고 멀어지는 별들
점점이 박힌 짐승의 눈들
아무런 소식도 보내지 않는 옛날의 애인
아, 나는 십일월에 생을 마치고 싶었다
십일월, 다섯줄의 시....류시화

당신은 마치 외로운 새 같다
긴 말을 늘어놓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당신은 한겨울의 저수지에 가 보았는가
그곳에는 침묵이 있다.
억새풀 줄기에
마지막 집을 짓는 곤충의 눈에도 침묵이 있다.
그러나 당신의 침묵은 다르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누구도
말할 수 없는 법
누구도 요구할 수 없는 삶
그렇다, 나 또한 갑자기 어떤
깨달음을 얻곤 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정작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라, 당신도 한때 사랑을 했었다.
그때 당신은 머리 속에 불이 났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은 외롭다
당신은 생의 저편에 서 있다.
그 그림자가 지평선을 넘어 전화선을 타고
내 집 지붕 위에 길게 드리워진다..
전화를 걸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류시화

벌레 한마리가 풀섶에 몸을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죽은 시늉을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며칠 뒤 가서 보니 벌레는 정말로 죽어 있었다
작은 바람에도
벌레의 몸이 부서지고 있었다
벌레만도 못한 인생을 나는 살았다
죽은 벌레를 보며
벌레만도 못한 인생을 살았다고
나는 말한다
죽은 벌레를 보며 벌레 보다 못한 인생을 살았다고 나는 말했다....류시화

여기 바람 한 점 없는 산속에 서면
나무들은 움직임 없이 고요한데
어떤 나뭇가지 하나만 흔들린다
그것은 새가
그 위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별일없이 살아가는 뭇사람들 속에서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새는 그 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나무는 더이상 흔들리지 않지만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새와 나무....류시화

내 앞에 빵이 하나 있다
잘 구워진 빵
적당한 불길을 받아
앞뒤로 골고루 익혀진 빵
그것이 어린 밀이었을 때부터
태양의 열기에 머리가 단단해지고
덜 여문 감정은
바람이 불어와 뒤채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또 제분기가 그것의
아집을 낱낱이 깨뜨려 놓았다
나는 너무 한쪽에만 치우쳐 살았다
저 자신만 생각하느라고
제대로 익을 겨를이 없었다
내 앞에 빵이 하나 있다
속까지
잘 구워진 빵
빵....류시화

세상을 잊기 위해 나는
산으로 가는데
물은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버릴 것이 있다는 듯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듯
나만 홀로 산으로 가는데
채울 것이 있다는 듯
채워야 할 빈 자리가 있다는 듯
물은 자꾸만
산 아래 세상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눈을 감고
내 안에 앉아
빈 자리에 그 반짝이는 물 출렁이는 걸
바라봐야 할 시간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류시화

들풀처럼 살라
마음 가득 바람이 부는
무한 허공의 세상
맨 몸으로 눕고
맨 몸으로 일어서라
함께 있되 홀로 존재하라
과거를 기억하지 말고
미래를 갈망하지 말고
오직 현재에 머물라
언제나 빈 마음으로 남으라
슬픔은 슬픔대로 오게 하고
기쁨은 기쁨대로 가게 하라
그리고는 침묵하라
다만 무언의 언어로
노래부르라
언제나 들풀처럼
무소유한 영혼으로 남으라
들풀....류시화

너의 눈에 나의 눈을 묻고
너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묻고
너의 얼굴에 나의 얼굴을 묻고
말하렴, 오랫동안 망설여왔던 말을
말하렴, 네 숨 속에 숨은 진실을
말하렴, 침묵의 언어로 말하렴
여섯 줄의 시....류시화

이마에 난 흉터를 묻자 넌
지붕에 올라갔다가
별에 부딪친 상처라고 했다
어떤 날은 내가 사다리를 타고
그 별로 올라가곤 했다
내가 시인의 사고방식으로 사랑을 한다고
넌 불평을 했다
희망 없는 날을 견디기 위해서라고
난 다만 말하고 싶었다
어떤 날은 그리움이 너무 커서
신문처럼 접을 수도 없었다
누가 그걸 옛 수첩에다 적어 놓은 걸까
그 지붕 위의
별들처럼
어떤 것이 그리울수록 그리운 만큼
거리를 갖고 그냥 바라봐야 한다는 걸
첫사랑....류시화

나무와 나무 사이
섬과 섬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어디에나 사이가 있다
여우와 여우 사이
별과 별 사이
마음과 마음 사이
그 사이가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
물과 물고기에게는 사이가 없다
바다와 파도에는 사이가 없다
새와 날개는 사이가 없다
나는 너에게로 가고 싶다
사이가 없는 그곳으로
여우사이....류시화

세상의 어떤 술에도 나는 더 이상 취하지 않는다
당신이 부어 준 그 술에
나는 이미
취해 있기에
잔 없이 건네지는 술....류시화

사막은 얼마나 생각할 것이 많으면 그렇게
한 생애를 길게 잡았을까
소금은 얼마나 인생의 짠 맛을 보았으면 그렇게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을까
얼음은 얼마나 고뇌에 차면 그렇게
마음을 차갑게 닫고 있을까
우물은 얼마나 후회가 깊으면 그렇게
마음 깊이 눈물을 감추고 있을까
심해어는 또 얼마나 마음을 강하게 먹었으면 그렇게
심해의 압력과 어둠을 견디고 있을까
별은 또 얼마나 말 못할 과거가 많으면 그렇게
먼 곳까지 달아나 있을까
사물들은 저마다 내게 안부를 묻는다....류시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걸까
마치 사탕하나에 울음을 그치는 어린아이처럼
눈앞의 것을 껴안고
나는 살았다
삶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태어나
그것이 꿈인 줄 꿈에도 알지 못하고
무모하게 사랑을 하고 또 헤어졌다
그러다가 나는 집을 떠나
방랑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내 앞에서 고개를 돌리고
등 뒤에 서면 다시 한번 쳐다본다
책들은 죽은 것에 불과하고
내가 입은 옷은 색깔도 없는 옷이라서
비를 맞아도
더이상 물이 빠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걸까
무엇이 참 기쁘고
무엇이 참 슬픈가
나는 짠 맛을 잃은 바닷물처럼
생의 집착도 초월도 잊었다
짠 맛을 잃은 바닷물처럼....류시화

여기 바람 한 점 없는 산속에 서면
나무들은 움직임 없이 고요한데
어떤 나뭇가지 하나만 흔들린다
그것은 새가
그 위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별일없이 살아가는 뭇사람들 속에서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새는 그 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나무는 더이상 흔들리지 않지만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새와 나무....류시화

바다에 섬이 있다
섬 안에 또 하나의 바닷가 있고
그 바다로 나가면 다시 새로운 섬
섬 안의 섬 그 안의 더 많은 바다 그리고 더 많은 섬들
그 중심에서 나는 잠이 들었다
잠들면서 꿈을 꾸었고
꿈 속에서 다시 잠이 들었다 또 꿈꾸었다
꿈 속의 꿈 그리고 그안의 더 많은 잠 더 많은
꿈들
섬....류시화

슬픔이 그대를 부를 때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라
세상의 어떤 것에도 의지할 수 없을 때
그 슬픔에 기대라
저편 언덕처럼
슬픔이 그대를 손짓할 때
그곳으로 걸어가라
세상의 어떤 의미에도 기댈 수 없을 때
저편 언덕으로 가서
그대 자신에게 기대라
슬픔에 의지하되
다만 슬픔의 소유가 되지 말라
저편 언덕....류시화

내 입술 속의 새는 너의 입맞춤으로
숨막혀 죽기를 원한다
내가 찾는 것은
너의 입술
그 입술 속의 새
길고 긴 입맞춤으로 숨 막혀 죽는 새
나는 슬픔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너를 껴안는다
내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삶은 다만 그림자
실낱 같은 여름 태양 아래 어른거리는
하나의 환영
그리고 얼만큼의 몸짓
그것이 전부
나는 고통 없는 세계를 꿈꾸진 않았다
다만 더 이상 상처받는 일이 없기를
내가 찾는 것은 너의 입술
단 한 번의 입맞춤으로
입술 속에서
날개를 파닥이며 숨 막혀 죽는 새
밤이면 나는 너를 껴안고
잠이 든다 나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온 몸으로 너를 껴안고
내 모든 걸 잊기 위해
입술 속의 새....류시화

봄비 속을 걷다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봄비는 가늘게 내리지만
한없이 깊이 적신다
죽은 라일락 뿌리를 일깨우고
죽은 자는 더 이상 비에 젖지 않는다
허무한 존재로 인생을 마치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봄비 속을 걷다
승려처럼 고개를 숙인 저 산과
언덕들
집으로 들어가는 달팽이의 뿔들
구름이 쉴새없이 움직인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
여러 해만에 평온을 되찾다
봄비 속을 걷다....류시화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삶에서 무엇을 위해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 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함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길 위에서의 생각....류시화

누구든 떠나갈 때는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날이 흐린 날을 피해서 가자
봄이 아니라도
저 빛 눈부셔 하며 가자
누구든 떠나갈 때는
우리 함께 부르던 노래
우리 나누었던 말
강에 버리고 가자
그 말과 노래 세상을 적시도록
때로 용서하지 못하고
작별의 말조차 잊은 채로
우리는 떠나왔네
한번 떠나온 길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네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나무들 사이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가자
지는 해 노을 속에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으며 가자
누구든 떠나갈 때는....류시화

여기 죽은 나무가 있다
누군가 소리쳐서 뒤돌아 보니
그 곳에 내가 쓰러져 있었다
물을 주면 살아날지도 몰라
누군가 다가가서 흔들어 본다
죽은 나무는 기척이 없다
나무는 자살을 꿈꾸지 않는다
그냥 잎을 버리고
죽을 뿐이다
나무는 자살을 꿈꾸지 않는다....류시화

시를 쓴다는 것이
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
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였다
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
내 가슴에 피를 뭍히고 날아간
새에 대해
나는 꿈꾸어선 안 될 것들을 꿈꾸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류시화

너였구나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것이
인기척에 부스럭거려서 여우처럼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
슬픔, 너였구나
나는 이 길을 조용히 지나가려 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이 겨울숲을 떠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를 깨우고 말았구나
내가 탄 말도 놀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숲 사이 작은 강물도 울음을 죽이고
잎들은 낮은 곳으로 모인다
여기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또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잇다
한때 이곳에 울려퍼지던 메아리의 주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무들 사이를 오가는 흰새의 날개들 같던
그 눈부심은
박수치며 날아오르던 그 세월들은
너였구나
이길 처음부터 나를 따라오던 것이
서리 묻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까마귀처럼 놀라게 하는 것이
너였구나
나는 그냥 지나가려 했었다
서둘러 말을 타고 이 겨울숲과 작별하려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에게 들키고 말았구나
슬픔, 너였구나
슬픔에게 안부를 묻다....류시화

눈을 깜박이는 것마저
숨을 쉬는 것마저
힘들 때가 있었다
때로 저무는 시간을 바라보고 앉아
자살을 꿈꾸곤 했다
한때는 내가 나를 버리는 것이
내가 남을 버리는 것보다
덜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무가 흙 위에 쓰러지듯
그렇게 쓰러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당신 앞에
한 그루 나무처럼 서 있다
자살....류시화

나는 벽돌의 감방 속에 갇힌 적이 없다
손바닥만한 창문으로 오월 하늘을 내다보며
무언의 노래를 불러 본 적이 없다
종달새처럼 비상하기 위해
불안하게 날개를 퍼덕인 적은 있었다
그것도 젊은시절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난 자유인인 체하지는 않으리라
바람처럼 쉽게 초월의 노래를 부르진 않으리라
그러나 난 내 삶 자체가
무언의 노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육체를 가두는 일보다 영혼을 가두는 일이
더 무섭다는 걸 난 잊지 않았다
보리밭 위로 날아오르는 종달새처럼
나는 누구의 것도 되지 않으리라
아무도 내 삶을 기억하지 않을지라도
무언가....류시화

소금이
바다의 상처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소금이
바다의 아픔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상의 모든 식탁 위에서
흰 눈처럼
소금이 떨어져내릴 때
그것이 바다의 눈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눈물이 있어
이 세상 모든 것이
맛을 낸 다는 것을
소금....류시화

잊었는가 우리가 손잡고
나무들 사이를 걸어간 그 저녁의 일을
우리 등 뒤에서 한숨지며 스러지던
그 황혼의 일을
나무에서 나무에게로 우리 사랑의 말 전하던
그 저녁새들의 일을
잊었는가 우리가 숨죽이고
앉아서 은자처럼 바라보던 그 강의 일을
그 강에 저물던 세상의 불빛들을
잊지 않았겠지 밤에 우리를 내려다보던
큰곰별자리의 일을, 그 약속들을
별에서 별에게로 은밀한 말 전하던
그 별똥별의 일을
곧 추운 날들이 시작되리라
사랑은 끝나고 사랑의 말이 유행하리라
곧 추운 날들이 와서
별들이 떨어지리라
별들이 떨어져 심장에 박히리라
잊었는가 우리가....류시화

너의 긴 속눈썹이 되고 싶어
그 눈으로 너와 함께
세상을 바라보고 싶어
네가 눈물 흘릴 때
가장 먼저 젖고
그리움으로 한숨지을 때
그 그리움으로 떨고 싶어
언제나 너와 함께
아침을 열고 밤을 닫고 싶어
삶에 지쳤을 때는
너의 눈을 버리고 싶어
그리고 너와 함께
흙으로 돌아가고 싶어
속눈섶....류시화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안녕, 내 혼의 무게로 쓰여진 이 시들의 이해하려면
너 또한 네 혼의 무게로 잠 못 이루어야지
어디, 나와 함께
이 낯선 저녁 안개 속을 지나갈까?
손잡고서
그러나 조심하거라
저 나뭇가지 위에 무서운 검은 새가 있어
너의 눈을 공격할까
두려우니
이곳은 시인들이 사는 이상한 나라가 아닌가
벌레들이 내 시집의 네 귀퉁이를 갉아먹고
나는 너의 두꺼운 안경이 무서워
아, 무서워
신발을 내 던지고 모래 언덕 너머로 달아나는데
너는 어느 별에서 왔길레 그토록
어려운 단어들을 가방 속에 넣고 있니?
머리가 아프겠구나
머리를 식힐 겸
우리 그 별의 이야기를 동무삼아
더 나아갈 수 없는 곳에 이를 때까지
이 저녁안개 속을
한번 헤쳐가 볼까?
죽음 너머의 세계를 너는 보았니?
아니다, 너에게는 너만의 세계가 있는 것이겠지
너 또한 시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 있겠지
버림받은 어린 시절, 그 상처 같은 것
슬픔 또는 허무같은 것
안녕 ! 잘 자라, 아가야
시를 평론한다는 사람들에게....류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