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산한 겨울 해변의 풍경
나이를 먹어 좋은 점 중의 하나는 불필요한 긴장과
호기심을 덜어낼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겨울에 찾아간 광안리의 해변에서
산책을 즐기는 여유가 행복한것도
그런 맥락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과 술에 취해 정신 없이 비틀거렸을 백사장,
하지만 광안리의 오후 풍경은
소란한 추억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선다.
마치 같은 얼굴이라도 옆 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처럼 해변에서 느끼는
한적한 여유를 다른 매혹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대낮보다 밝은 네온사인, 태양보다 뜨거운 정열로
흠뻑 취했던 한여름 밤의 꿈은 어디로 간 것인지...
스산한 겨울의 골목으로 접어든
해변의 정오는 꿈을 깨우듯 선명한
어색함을 뒤집어 쓰고 있다.
모든 것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정오의 해변에서 사람들은 소금이 아니라
고독에 절여 있는 공기라도 호흡하는 것일까?
해변에 조각된 외로운 발자국들,
파도가 발자국을 하나 둘 지워 가듯
여기에 묻힌 아픈 추억들도 세월이 씻어가겠지.
잊기 위해 몸부림치면 칠수록
기억은 결코 얌전하게 있어 주지 않는다.
파도처럼 서서히 달래는 여유를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사는 것 같아. 저 파도는
결코 모든 것을 한번에 지우려고 하지 않는데...
얼마나 많은 사랑의 맹세와 우정의 다짐을
이 해변에 묻어 왔을까?
그리고 그 맹세와 다짐만큼 많은 배신과
상처를 파도는 묵묵히 지켜보았던 것이겠지.
하지만 모든 것을 소소한 세속의 일상으로
치부하듯이 파도는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변함없이 계속 한다.
달라진 것은 없다.
사람들은 여전히 사랑과 상처를 반복한다
타인의 행복이 나의 고독을 더욱 무겁게 할 때가 있다.
비에 젖은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
우산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지.
사람도 물론이지만 혼자 있다는 것은
그림자도 외로워 보일 테니까
배고픔을 참을 수 있어도 외로움은 참기 힘든 사람들,
그들이 해변을 찾는다.
하지만 상처가 회복되더라도 사람들은 흉터를 통해서 상처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 흉터가 서로의 외로움을 쉽게 알아보는
문신이 되고 다른 인연을 만들게 된다.
그런 식으로 상처에 대한 가장 확실한 복수,완전한 망각이 완성되는 것이다
고독을 즐길 수 있다는 건 떠올릴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허락 없이 상처와 외로움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에...
아픈 상처가 되는 고독의 꼭지점은 쉽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대개의 경우 한번쯤 달아보고
싶은 귀걸이가 될 수도 있겠지.
그것이 죄악이 될 필요는 없으니까...
파도에게 말을 걸고 있는 사람의 여유.
늦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항상 서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고독이라는 것도
여유와 함께 할 때는 나름의 기품을 자아낼 수 있다.
단지 오래되면 그 무게가 무거워지기
때문에 불편하게 느낄 수도 있을 뿐이다.
홀로 있어서 그리고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대상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게 도와 준다
父子라고 짐작되는 두 사람의 산책이 눈을 잡는다.
누구나 아버지와 아들로 살아가지만 모두가
똑같은 의미를 남기는 것은 아니다.
왜 우리는 약해져가는 상대 앞에서 이해와
용서를 시작하는 것일까?
내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는
그의 약한 모습을 발견한 때였음을 기억한다
해변을 찾은 한무리의 중년 여인들,
여고생들처럼 자지러지는 모습에서 무심코
그들의 나이를 검색하는
나의 편견이 인색하게 느껴진다.
아줌마라는 단어에 낭만과 청춘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우리들의 무심함.
가끔씩 그들을 가족과 친구라는 이름에 조금 가까운
타인 쯤으로 여기는 거부감이 부끄러워진다
바다 위에 흘려진 태양의 파편들은
물비늘이 되어 배를 띄우고 있다.
이제는 햇살마저도 느리게
내려앉는 계절이기 때문일까?
한결 얌전해진 파도의 율동을 따라 움직이는
배의 궤적이 차분한 안무처럼 보인다.
세상을 가득 채우고서도 자취를 보이지 않는
바람에 끌리며 무색무취의 담백한 삶을 노래하고 싶다
날카로운 핀으로 찌르듯이 또렷한 포커스와 빠른
셔터스피드를 고집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의 지각력이
사진처럼 명확하고 선명한 것일까?
언제나 추억 속에 남아 있는
기억들은 녹아 섞인 다른 색깔의 아이스크림처럼
끈적하고 불투명하게 재생된다.
날아가는 새의 흔들리는 잔상처럼
분명하지 않은 그 무엇, 그것이 바로
이 해변이 풍기는 고독의 주소가 아닐까?
무심한 파도를 바라보는 환경미화원의 시선,
부디 해변에 묻혀 있는 오래된 사연의
찌꺼기들은 청소하지 말기를...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지 모르지만
언젠가 그들 스스로가 거두어 가리라고 생각합니다.
님들도 한번쯤 오래된 추억의 서랍을
뒤적이는 계절이 되기를...
건강하세요~~
ㅡ E J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