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우체국
37red ━┓ 영상시 2004/01/18 07:26   http://blog.azoomma.com/37red/113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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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 시인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 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 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 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 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 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 속 주머니에
넣어 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 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 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 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 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 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 넣거나
수평선을 잡아 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